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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여행지

박달재 이야기 (201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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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재는 충북 제천시 봉양읍(鳳陽邑) 원박리(院朴里)와 백운면(白雲面) 평동리(平洞里) 경계에 있는 고개로,

치악산의 맥을 뻗어 백운산이 되고 그 줄기가 다시 남으로 달려 구학산, 박달산, 시랑산을 이루고

 박달재는 동서로 봉양과 백운을 잇고 멀리는 제천과 충주를 잇는다.

 

 천등산 박달재라고도 하며, 조선시대에는 천등산과 지등산이 연이은 마루라는 뜻에서 이등령으로 불리기도 했다.

해발 453m, 길이 500m. 예로부터 제천에서 서울에 이르는 관행길이 나 있으나,

 첩첩산중으로 크고 작은 연봉이 4면을 에워싸고 있어 험준한 계곡을 이룬다.
박달재에는 박달과 금봉이의 슬픈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조선조 중엽 경상도에 살던 젊은 선비 박달(朴達)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던 길에 충북제천군 백운면 평동리에 도착했다.
박달은 한 농가에 찾아들어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 집에 살던 금봉이라는 처녀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몇일을 묵게 되었다. 서로 사랑하게된 이들은 渼事 과거에 급제한 후 함께 살기로 굳은 언약을 하였다.

 

 

 

 

 그러나 박달은 과거 시험장에 나가서도 금봉을 그리워하는 시를 지어 낙방하였다.

 

 

 

 

 박달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금봉은 박달이 떠나간 고 갯길을

박달의 이름을 부르며 오르내리다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채 죽고 말았다.


 

 

 

금봉의 장례를 치른 뒤 사흘째 되던 날 낙방거사 박달은 풀이 죽어 평동에 돌아왔다.

 금봉의 죽음을 알게된 박달은 목메어 울며 고갯깃를 바라보니 금봉이 너울너울 춤을 추며 고갯마루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박달은 금봉의 이름을 부르며 금봉의 뒤를 쫓아 달려가 아슬아슬하게 금봉을 잡았으나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후로 사람들은 박달이 죽은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 하고,

박달과 금봉이의 사당을 지어 그 넋을 위로 하고 있다.

 

 

 

 

 

 

 

 

 

 

박달과 금봉이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형상화한 작품

 

 

 

 

 

 

 

 

 

 

 

 

 

 

 

 

이제는 교통량도 많지 않은 박달재에는 관광객을 위하여 목각공원을 조성해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곳은 1217년(고려 고종 4) 7월 거란군이 10만 대군으로 침공해 왔을때

 김취려() 장군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전공을 세운 전승지로 유명하다.

또한 인근의 지등산 인등산과 함께 천()·지()·인()을 모두 갖춘 신령스런 곳으로,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성소로 알려져 있다.

 

 

 

 

울고 넘는 박달재 가사 (작사 반야월/ 작곡 김교성/ 노래 박재홍)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넘는 우리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집을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오 소리쳤오 이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산골 나를두고 가는님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가소/
도토리 묵을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박달재 하늘고개 울고넘는 눈물고개/ 돌뿌리 걷어차며 돌아서는 이별길아/
도라지 꽃이피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금봉아 불러보나 산울림만 외롭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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